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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경주 Second home

2021년 여름, 경주 2

by 두번째 집 2021. 10. 12.

경주를 생각하면 그저 그런 보통의 시골이라고 단정 짓기 쉽다. 하지만 경주는 시골 치고 사람이 모일만한 구색을 잘 갖추고 있다. 울산과 포항이 인접해 공업단지가 많으며, 대구와 부산을 1시간이면 오갈 수 있기에 접근성이 좋다. 옛 신라의 수도답게 시내 곳곳에 즐비한 유적들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며, 관광단지에는 고급 호텔이 많다. 위의 장점들만 보면 경주는 크게 발전하기 충분한데, 시내는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높은 건물은 찾아볼 수 없다. 새로 건물을 짓기 위해 땅을 파면 유물들이 나오니, 개발하기 좋은 땅은 기존에 지어진 건물들이 있는 자리뿐이라는 말도 있다. 실제 거주하는 사람들은 변함없는 도심이 답답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이런 모습들이 좋다.

 

경주에는 놀이공원이 하나 있다. 놀이터 같은 곳이 아닌, 롯데월드 같은 진짜 놀이공원 말이다. 시골 구석에 놀이공원이라니! 재미있는 기구가 얼마나 있겠어 싶으면서도, 궁금함을 이기지 못했다. 경주에서의 둘째 날, 여행커뮤니티에서 알게 된 한 분과 동행하여 경주월드에 가기로 했다. 개장시간에 딱 맞추어 입장하면 놀이기구가 준비가 덜 되어 있을 수 있다 하여, 오전 11시 즈음 동행 분과 만나 입장한다.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니 오른편에 무서운 놀이기구들이 보인다. 자이로스윙인데 360도 돈다. 이런 것은 처음 봤다. 줄이 엄청 짧길래, 호기심에 타본다. 한 바퀴 돌자마자 후회했다. 정신이 없고 머리가 어지럽다. 에버랜드의 더블락스핀을 능가하는 스릴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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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월드 크라크 / 메가드롭, 파에톤

경주월드에서 가장 유명한 놀이기구 드라켄까지 타고나니 무서울게 없어졌다. 반대편에 위치한 파에톤, 토네이도 등 주변 놀이기구들을 전부 타고나서 간식을 먹는다. 놀이기구를 너무 많이 타서 그런지 아직도 속이 울렁거린다. 규모는 생각보다 크지 않은데, 놀이기구는 꽤 알차게 구성되어있다. 모든 놀이기구를 한 번씩 탔음에도 그냥 가기 아쉬워, 크라크와 드라켄을 한 번씩 더 타고 다음을 기약한다. 오전부터 너무 열심히 돌아다녔는지 힘에 부친다. 시내에서 좀 쉬어야겠다.

 

황리단길 주변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정처 없이 걷는다. 이곳 골목도 많이 변했다. 작년만 해도 큰길 양 옆으로만 가게가 성행했었는데, 이제는 안쪽 골목에도 각양각색의 가게들이 존재한다. 구경할 게 있나 싶어 돌아다녀보지만, 죄다 카페뿐이라 흘겨보며 지나간다.

 

8월 오후 느즈막, 황남동 고분군

매년 경주에 왔음에도, 새로이 알게 되는 장소가 있다. 이번에는 황남동 고분군이 그렇다. 황리단길을 끝까지 걸어 나오면, 상가는 온데간데없고 넓은 들판을 마주하게 된다. 첨성대 방향으로 걷다 보면, 한편에 커다란 고분과 높게 솟은 메타세쿼이아 나무 5그루를 볼 수 있다. 나무가 꽤 높아 멀리서도 잘 보이며, 나무 밑에는 의자가 여러 개 있어 쉬었다 가기 좋다. 매번 지나다니는 길이었는데 왜 몰랐을까,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다. 비어있는 의자에 누워 잠시 눈을 감는다. 바람결에 스치는 이파리 소리, 자동차 엔진 소리, 멀리서 들리는 왁자지껄 대화 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배도 부르고 날씨도 맑고 나무 그늘 밑에서 바람도 솔솔 불어오니 기분이 좋다. 절로 눈이 감긴다.

 

황남동 고분 앞 연못에 핀 연꽃

선잠에서 깨어 못다 본 주변을 돌아본다. 고분은 대릉원에 있는 것만큼 커다랗고, 앞에 자리한 연못 에는 연꽃이 한가득이다. 이미 절정이 지났는지 멀쩡히 피어있는 꽃이 드물다. 이대로 여름이 흘러가 버릴 것 같다.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피려 하니 가을도 머지않았다.

 

숙소에 들어와 채비를 새로 하고 길을 나선다. 골목 어귀에 베트남어가 가득한 식당이 보여, 반가운 마음에 분짜 한 그릇 주문한다. 베트남어로 말을 거니 신기해하면서도 반가운 눈치다. 식당 한편에는 베트남 식품들로 가득한 것을 보니, 경주에 베트남 사람이 꽤 있나 보다. 가게 구경이 끝날 즈음 음식이 나왔다. 구운 고기, 건조하게 붙어있는 면, 고수 따위의 향이 있는 식물 잎, 채 썰은 베트남 고추, 느억맘 소스까지 구색을 정확하게 갖추었다. 맛 또한 기대했던 그 맛이다. 하노이의 어느 익숙한 골목에 와있는 듯한 저녁 시간이었다.

 

저녁 어스름, 봉황대 고분

이내 식사를 마치고 봉황대 공원으로 산책을 간다. 유독 나는 봉황대에서 산책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 공원의 특징은 주변에 유명한 장소가 많아서인지,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다. 고분이 있긴 하지만, 관광지라기보단 동네 공원에 가깝다. 주변에 건물이 많아서인지 공원 어귀에는 가로등이 여러 대 설치되어 있으나, 공원 안에는 가로등이 별로 없다. 전반적으로 어둑하기에,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온전히 산책에 집중할 수 있으며, 고분 사이사이 오솔길이 뻗어있어 걷는 재미가 있다. 나는 이 공간이 너무 좋다.

 

봉황대 공원 옆, 스틸룸(STILL ROOM)

봉황대 옆, 몇 년째 눈여겨보는 건물이 있다. 1층은 보틀 샵, 2층은 바인 것 같다. 산책 후 센치해진 마음 때문인가, 술 한잔 하고 싶어 무심결에 2층으로 걸음 한다. 바이지만, 양식당을 겸하고 있다. 수도권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몰트 바가 경주에도 있다는 것이 깨나 반갑다. 잔술도 꽤 저렴한 편이다. 글렌피딕 18년 스몰 배치, 1잔에 18000원. 스템이 있는 튤립 잔에 내어주신다. 글렌피딕 12년에 비해 부즈가 덜하고 익은 사과 같은 향미가 있다. 한 모금 뒤에는 끈적하며 여운 있는 꿀 같은 단맛과 부담스럽지 않은 스파이시함이 입 안을 맴돌며, 피니시로 과일 같은 향이 긴 여운을 남긴다. 에어링까지 적당히 되어 있어서인지 딱 내 취향이다.

 

한 모금 두 모금하며 바텐더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바텐더님은 경주 태생이셔서 그런지, 고향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시다. 최근 들어 황리단길에 가게가 너무 많이 늘어 걱정이라고 하신다.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은 좋지만, 저기 있는 가게들이 다 영업이 잘 될지는 모르겠다고 하신다. 내가 돌아봤을 때도 가게가 많다 싶었는데, 바텐더님은 진작에 인지하고 계셨다. 이외에 전통시장을 위치에 따라 윗 시장, 아랫시장으로 부르는 등 여타 정보를 많이 알 수 있어 좋았다. 다음에 경주에 오면, 위스키 한잔하러 꼭 들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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